1.
잠자리에 들기 전 마크와 한 말이 생각났다.
"잠에서 깨어나면 맨 먼저 부츠를 뒤집어 들고 흔들어야 하는 걸 잊지 마세요."
"왜요?"
"전갈 때문이죠. 잘 자요."
(더글러스 애덤스, <마지막 기회 Last Chance to see>)
2.
버스에서 한 커플이 자리가 없어 선 채로 있었는데, 남자가 애인의 볼에 뽀뽀를 하면서 동시에 재빨리 신발을 벗어 손가락으로 발바닥을 긁었다.
그 장면을 본 나는 얼어붙었다. 뽀뽀로 애인의 시선을 돌리면서 발바닥을 몰래 긁다니. 충격적일만큼 자연스러웠다. 내 남자친구가 내게 뽀뽀하면서 몰래 항문을 긁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3.
위의 두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인데, 왜냐하면 이미 전갈이 나타나는 방에 있는 상황인 것이고, 이미 발바닥을 유연하게 긁는 남자를 봐버린 것이므로.
그저 바뀔 수 있는 것은 "전갈 때문이죠. 잘 자요."를 어떻게 들어넘길 것이냐,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찾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전갈에 물리는 일은 피할 수 있겠군,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부츠에서 전갈이 기어나와 몸을 C자로 휘어서는 내게 독을 쏠 상황을 상상하며 밤잠 한 숨 못자는 편이면 애처로운 일이다.
전갈에 대한 언급은 그러니까 확실히 "잘자요"에 핵심이 있다. 불안은 스스로 요리하고 푹 잘 것. 전갈이 나타날 것인지, 그 애가 나를 공격할 것인지, 나는 그 전갈을 설득하거나 회유할 수 있을 것인지는 전혀 내 능력 밖의 문제이므로, 그러니까 전갈의 선택은 전갈에게 맡길 것. 전갈이 자고 있는 나를 공격하기보다 부츠에 숨기를 원할만큼 방어적이고 소심하기를 희망하고, 푹 잘 것.
발바닥을 긁는 남자에게서 애인의 눈을 돌리는 얄팍한 꼼수를 볼 것인가, 그렇게라도 긁어야만 견딜 수 있게 하는, 미치도록 가려운 무좀의 잔혹성을 볼 것인가.
사태는 전혀 못 바꾸지만, 그 상황 안에서 내 마음가짐만 바꿔 조금 견딜 수 있게 되는, 작고 작은 깨알 같은 선택의 문제.
4.
불안을 요리하는 선택까지는 아직 못하고 있으나,
남친이 항문을 긁더라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
작은 성과랄까.
음... 재밌네요. 입을 맞추면서 발바닥을 긁다니. 그냥 긁어도 될텐데요. 그남자 귀엽네요. 거기서 남친의 항문까지 발전하시는 사유이 단계가 재밌습니다. :)
답글삭제참. 조그맣게 살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 참 소박해서 아름답네요.
답글삭제@서정적자아 - 2010/04/26 17:33
답글삭제아... 아름답다기는 정말 작게 살고 있어서 말이죠 ^^
@서정적자아 - 2010/04/26 17:33
답글삭제음.
뽀뽀 단계는 지났으나 질병 공개 단계는 아직 넘지않은 커플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