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6일 월요일

깨알같은 선택들


1.

잠자리에 들기 전 마크와 한 말이 생각났다.

"잠에서 깨어나면 맨 먼저 부츠를 뒤집어 들고 흔들어야 하는 걸 잊지 마세요."
"왜요?"
"전갈 때문이죠. 잘 자요."

(더글러스 애덤스, <마지막 기회 Last Chance to see>)


2.
버스에서 한 커플이 자리가 없어 선 채로 있었는데, 남자가 애인의 볼에 뽀뽀를 하면서 동시에 재빨리 신발을 벗어 손가락으로 발바닥을 긁었다.
그 장면을 본 나는 얼어붙었다. 뽀뽀로 애인의 시선을 돌리면서 발바닥을 몰래 긁다니. 충격적일만큼 자연스러웠다. 내 남자친구가 내게 뽀뽀하면서 몰래 항문을 긁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3.
위의 두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인데, 왜냐하면 이미 전갈이 나타나는 방에 있는 상황인 것이고, 이미 발바닥을 유연하게 긁는 남자를 봐버린 것이므로.

그저 바뀔 수 있는 것은 "전갈 때문이죠. 잘 자요."를 어떻게 들어넘길 것이냐,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찾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전갈에 물리는 일은 피할 수 있겠군,으로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부츠에서 전갈이 기어나와 몸을 C자로 휘어서는 내게 독을 쏠 상황을 상상하며 밤잠 한 숨 못자는 편이면 애처로운 일이다.
전갈에 대한 언급은 그러니까 확실히 "잘자요"에 핵심이 있다. 불안은 스스로 요리하고 푹 잘 것. 전갈이 나타날 것인지, 그 애가 나를 공격할 것인지, 나는 그 전갈을 설득하거나 회유할 수 있을 것인지는 전혀 내 능력 밖의 문제이므로, 그러니까 전갈의 선택은 전갈에게 맡길 것. 전갈이 자고 있는 나를 공격하기보다 부츠에 숨기를 원할만큼 방어적이고 소심하기를 희망하고, 푹 잘 것.

발바닥을 긁는 남자에게서 애인의 눈을 돌리는 얄팍한 꼼수를 볼 것인가, 그렇게라도 긁어야만 견딜 수 있게 하는, 미치도록 가려운 무좀의 잔혹성을 볼 것인가.

사태는 전혀 못 바꾸지만, 그 상황 안에서 내 마음가짐만 바꿔 조금 견딜 수 있게 되는, 작고 작은 깨알 같은 선택의 문제.



4.
불안을 요리하는 선택까지는 아직 못하고 있으나,
남친이 항문을 긁더라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

작은 성과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