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한기, 더부룩함_2009. 11. 22.

 

 

무시하기엔 좀 성가시게 내리는 비를 우산없이 맞고 돌아오는 길에, 얼굴과 머리털 위에 흩뿌려진 빗방울의 감촉이 낭만적이라기엔 을씨년스러워 가을도 넘어선 겨울인가 하는 뻔한 생각을 하며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화개장터 이후로 엄마 아버지만 빼고 있을 건 다 있는, 24시간 지나치게 환한 이 곳. 환한 조명 탓인지 편의점 거울은 사람 유난 초췌하게 보이는 기능이 엘리베이터 거울 다음급은 된다. 눅눅해지고 죽죽 빗금이 간 저 얼굴은 누구냐. 거울 속에 흔들리는 내 눈을 내가 피하며 컵라면 몇 개와 주전부리용 과자 두어 봉지를 사들고 나왔다. 신호등 불을 기다리며 선 건널목에서 한산한 도로를 부앙 하고 달리는 자동차가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가자 한기가 선뜻한 것이 감기면 곤란하다, 생각한다. 돌아와서 소변을 보니 오줌이 뜨겁다. 소변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몸살 감기의 자가진단 1단계이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잠을 청하려는데 낮에 과하게 먹은 돈까스와 컵라면의 잔재가 배 안을 휘집고, 속이 가히 좋지 않다. 이런 더부룩함은 글을 끄적거릴 때 약간 성가신 편두통처럼 나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증은 알겠는데 애를 할 건 무어냐, 더부룩함따위를? 여보게, 리듬과 정량에 대한 감각을 잊어 그렇다네. 채 씹지도 않은 입안으로 와구와구 숟가락을 놀리면 더부룩하지. 위란 것은 자네 주먹만이나 한데, 와르르 쏟아넣으면 탈이 날밖엔.

명치께를 연속하여 쓸어내려봐도 가스는 트름으로도 아래 방귀로도 안나오고 가운데츰을 가만히 누르고만 있다. 이 느낌이 마냥 괴로운 것은 아니다. 점심무렵 바삐 놀린 숟가락 건너편의 인물과의 시간이 기억나는 것이니, 자학적인 방법이나마 회상의 도구라고 여겨나 보자. 물론 이건 이 나이 먹드룩 체하지 않게 밥도 제대로 못먹는 나를 벌하지 않기 위함이다. 걔좀 고만 혼내, 주눅든거봐.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과일이 구르는 버스_2009. 11. 3.


1.
지난 달 시청부근으로 가던 길에, 추석 즈음이었으니 가판에 마저 팔지 못한 잘생긴 과일들이 많던 그 때였던지라 버스에도 아기 머리통만한 누릿누릿한 배를 비닐봉지가 미어지도록 들고 탄 부부가 있었다.

어디 멍든 데도 없이 배가 참 실한데, 싸게 잘 주고 샀어,의 구매후기를 주고 받던 그 때, 버스의 급정차와 관성의 법칙과 야박하게 작은 비닐봉지가 한데 어우러진 참사가 일어났다. 배 예닐곱 개가 버스 바닥에 와르르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참하고 실하던 배들은 옆구리를 찧어가며 버스 속도를 맞춰 바운딩을 해댔고, 아줌마와 아저씨는 으메 으째쓰까 하며 배를 잡으러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다음이 목적지라 버스에서 내렸는데 내릴 문이 열리자 나를 따라 배 하나가 같이 내렸다. 내 발 옆에 내린 배를 집어들었더니 그 곱던 배 뒤통수가 폭삭 깨져있다. 뇌진탕 배는 주인아저씨에게 "얘가 저랑 같이 내렸어요"하며 건내주었다. 약속장소로 향하는 내내 계속 배즙이 손에 묻어있었다.


2.
엄마 집에서 반찬을 배급받아 돌아오던 길. 나는 버스에서 늘 그랬듯 정신줄을 놓고 목이 부러져라 잠든다. 차가 크게 커브를 돈다고 느낄 때, 발밑에 두었던 반찬 바구니에서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싸온 사과 한 알이 데구르 굴러 저 건너편에 나처럼 목을 꺾고 졸고 있던 아저씨 의자 밑으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저 사과를 구하러 아저씨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야할지, 아저씨를 깨워서 사과 좀 줍쇼,해야 하는가를 난감해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다시 커브를 크게 돈다. 사과는 툴툴대며 다시 내게로 굴러왔다. 사과와 눈물의 상봉. 사과의 수평진자운동을 보고 있던 맨 뒷자리 청년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통하였느냐



동물과 함께 살 때, 교감하는 순간에 느끼는 감격과 보람을 동거의 동력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란 너무도 기나긴 고회의 시간 끝에나 온다. 어떤 사탕이 죽여주게 맛있다고 들었고, 아직 콩알만큼을 시식해보았을 뿐인데, 다음 사탕을 먹게되는 순간이 9년 후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사지가 조금 허탈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감격스러운 것은 '아, 얘랑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에서 온다. 고양이 발을 붙들고(이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니가 잘 놀다가 갑자기 발톱으로 나를 긁는게 싫거든, 그러지 좀 말자,라고 아무리 간곡하게 부탁해도 고양이는 눈을 모로 세우고 손을 긁고 사라지는 순간처럼. 말의 영역이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꽤 각별한 것이다. 내 고양이와 나는 교감과 화합의 순간으로 수렴할 필요가 없다. 하면야 좋겠지만 애써 화합과 평화를 이마에 붙여두고 눈치보지 않아도 괜찮다. 각자의 구석에서 서로 노려볼지언정, 어떤 상대와 말이 지독하게 안통하는 경험은 필요하다. 말이 안먹힐 때 어떤 것은 감내해야하고,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하며, 사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니 스트레스는 덜 받는 편이 좋다는 것도.
우린 어쩔 수 없어,식의 냉소하는 버릇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얻을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