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3일 월요일

<소망 없는 불행>, 페터 한트케

   겨울이 되어 건축 일이 없으면 실업 보조금이 지급되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녀는 그를 찾아 이 술집 저 술집 뒤지고 다녔고 그럴 때면 그는 고소하다는 듯 악의에 가득찬 채 그녀에게 남은 돈을 내보이곤 했다. 그에게 두들겨 맞지 않으려고 그녀는 몸을 피했다. 그녀는 더이상 그와 말하지 않았고 말없이 겁에 질린 아이들이 후회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는 것을 밀쳐냈다. 마녀! 너무도 매정하게 구는 어머니를 아이들은 적대감에 차서 바라보았다. 부모가 외출하고 없을 때면 아이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잠을 잤으며 아침녘에 남편이 아내를 방으로 밀어 넣으면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발을 디딜때마다 그녀는 멈춰섰으나 이내 그가 어머니를 방으로 밀어넣었다. 두 사람 다 집요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어 <짐승같은 놈! 짐승같은 놈!> 하면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말을 하면 그 말 때문에라도 그는 그녀를 제대로 팰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얻어맞을 때마다 잠깐씩 그를 비웃었다. (pp.49-50)



예전 다섯 식구가 바글바글 얽혀 살던 낡고 낡은 아파트가 뉴스 보도자료 화면에 나오자, 용케 저기서 다섯이 엉켜 살았구나 싶었다. 그 공간은 나 한몸 앉고 누워 있을 때는 좁아도 그냥 좁은 것이었는데, 카메라의 눈을 가져다 대니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게 좁아졌고 낡고 부스러지고 있었다. 무슨 사건이 있어 보도되는 중이었는데 나는 내용도 못듣고 거즘 반 충격으로 그 공간을 보았다.


게다가 술을 즐기고 식구들을 두들겨주는 것으로 제 답답함을 푸는 아버지가 있으면 더없이 좁다. 피할 곳이 없으니 몸을 쪼그리고 쪼그려 없는 척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의 저 흔하디 흔한 폭력. 저 많고 많은 환멸. 많이들 맞아서 괜찮아진다는 소리가 아니라 예사로운 큰 소리에도 가슴이 덜컥덜컥하게 되는 것이, 어미와 아이들이 여기저기 맞고 훌쩍대는 것도 일상이 되더라는 말이다. 반복으로, 일상으로, 스며든다는 점이 무서운 것이다.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서정 시대_2010.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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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어에 한 번씩 씨발이나 존나를 섞어 별볼일 없는 삶을 토로하던 학생 둘이 버스 내 뒷자리에 있었다. 말하는 내용이나 시위하듯 드높이는 목소리는 매한가지여도, 한 명은 근거 없는 희망으로, 다른 한 명은 설득력 없는 절망으로 귀결하는 점이 다르다면 달랐다. 다시 말해, "씨발, 말하다보니까 기분이 쫌 좋아졌어"와 "그래? 난 아직도 짜증 대박나. 존나 콱 죽으까"로 갈렸다가, 다시 크크크크 하는 바닥 긁는 웃음소리와 서로를 향해 "병신"하며 대화를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하루는 내가 티끌만했다가 다음 날은 우주 같아지는 저 서정시대의 지난한 진자운동을 끝내는 방법은 나이를 먹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진자운동이 끝나고 마침내 어느 곳에 내릴 수 있게 될까.

자정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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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자정 무렵에 된장찌개를 끓였다. 얼마 전 국물내기 최고의 듀엣 멸치와 다시마를 구입했으므로 냄비에 이 듀엣과 굵게 썬 무를 넣고 국물을 우려내었다. 그리고 물이 끓을 동안 감자 껍질을 벗기고 고추를 썰고 버섯을 찢고 두부를 잘랐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하게 노래를 부르며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유를 과시하는 것이다. 된장찌개 정도야!


엄마가 요리할 때는 꼭 서너가지 음식, 그것도 나에겐 복잡하거나 불안하기 그지 없는 것들을 한꺼번에 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신기한 광경이다. 저 현란한 멀티태스킹이 어찌 가능한가?


서너가지는 안되더라도 재료 준비 시간을 없애며 바로 조리하는 마음의 여유에는 맛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자신이 없으면 가스불 앞에 서서 1분에 한번씩 휘저으며 고개를 갸웃대며 땀을 삐질거리며 맛을 보고 입맛을 짭짭 다시고 고개를 다시 갸웃대면서 결국 사먹는게 싸다는 결론을 내게 되므로. 내게 맛에 대한 자신감을 실어준 멸치와 다시마 듀엣에게 다시 한번 축복을 내리사.


2010년 8월 16일 월요일

<어느 비평가의 죽음>, 마르틴 발저

 제가 선생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점은 실패는 일종의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적으로 대인관계가 껄끄럽습니다. 실패자는 ㅡ 제가 실패한 사람을 이런 명칭으로 불러도 좋다면 말입니다만 ㅡ 자기 자신한테보다도 주위 사람들한테 더 민망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실패자에게는 자신의 실패가 엄청나게 큰 확대경이며, 그는 이 확대경을 통해 온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성공한 사람도 아직 그렇게 보지 못했을만큼 그렇게 세밀하게 세상을 보는 것이죠. 세상을 대강 보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조건들 중의 하나인데, 모든 직업이 다 그렇죠.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인지할 능력이 없는 것, 이것이 성공의 조건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세상을 미화해서 봅니다. 그가 설령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인물에 반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미화하는 반대자일 따름이죠. 그는 항상 빼어난 사람으로 살아남게 되고 세상은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한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한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기 때문에 세상은 좋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의 근본적인 불행은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성공합니다. 무엇인가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ㅡ 사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말입니다 ㅡ 그건 그에 의해 극도로 비난 받고 저주를 당합니다. 그는 세상이 더 개선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의 현존 상태에 대한 가장 과격한 비판자이지만, 그의 존재의 분위기를 통해 사람들은 이 세계가 구원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대해 세상은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개선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이 삶의 좌절을 가져오는 불변의 체계라고 여긴다면, 그는 실패자이며 세상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되죠. 그러나 자기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되지는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말이죠. 실패자의 충족은 사실 그가 거슬리게 되는 이 세상을 완전히 알게 되는 점에 있습니다. 이 인식을 통해 그한테서는 풍부한 지식이 자라나고, 그 속에서는 마치 휘황찬란하고 온갖 음향이 흘러 넘치는 낙원에서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모든 통찰의 조건이 실패라는 사실이 실패를 지고의 선 그 자체로 만듭니다.

아직 듣고 계세요?

 
위의 글에서 실패자(루저)란 말이 나와서, 사족의 메모 :

루저라는 단어가 그 어망에 포획되는 사람에겐 좌절감을 준다고들 하는데, 나는 루저에게는 열려있는 방편이 있으므로 (진 다음에는 이길 수 있으니까) 그닥 위험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잉여나 쓰레기 쪽이 더 무서운 것이다. 남아도는 존재가 머물 남아도는 자리는 없으므로.
누구나 다리를 딛고 설 자리가 필요한 것인데 땅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잉여자가 있을 공간은 전 지구를 통틀어도 한뼘도 없게 된다. 부피를 가진 자가 자신을 얼마나 쪼그라들게 해야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 눈에 '덜 거슬리게' 한 켠에서, 없는 것처럼 살아남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너 졌어,가 아니라, 넌 누구냐, 왜 여기서 얼쩡거리냐,가 더 공포스럽다.


남아도는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자살한다는 레밍에 대한 와전된 말들처럼, 잉여자가 택할 유일한 방법은 자발적으로 절벽아래로 사라져주는 것이라면. 잉여자를 꼴사납게 보는 눈들은 그 방법을 은근하게 바란다면 어떤가. 내겐 더없는 납량특집이다.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페르디두르케>, 비톨트 곰브로비치


 "우리가 마치 굴을 입에 넣고 삼키듯이 넙죽 목으로 넘기는 고통이라면, 사탕처럼 달콤한 당신의 수치심, 캐러멜 크림 같은 공포, 케이크 같은 비참함, 사탕과자 같은 고통, 그리고 막대사탕 같은 절망을 나한테 떠벌리지 마시라. 가장 힘겨운 이 사회의 상처, 예를 들어 아이 넷을 부양해야 하는 노동자 가족의 굶주림을 대담한 손가락으로 긁어대는 숙녀는, 어째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귀를 후비는 일에는 그 손가락을 쓰지는 않는가? 그게 바로 훨씬 더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굶주림, 혹은 전쟁 동안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 이런 것은 삼킬 수 있다. 심지어 아주 맛있게 삼킬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먹을 수 없는 맛없는 화합물들도 있다. 잡다하고 혐오스러운, 그렇다. 토할 것 같은, 악마적인 그 화합물들을 인체는 삼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바로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맞추어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죽더라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더라도,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고상하게, 지극히 고상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숙의 이름으로 해야만 하는 것, 여고생의 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맛있는 것을 거부하고, 입천장에 맞서 혁명을 일으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삼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심신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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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에 밥도 부실히 먹고 요즘 특히나 어지럼증이 심해져 오늘은 모처럼 닭을 먹었다. 먹는 행위로 힘을 내보겠다는 알량한 생각에는 김유정 말년의 그 편지가 너울거리는 것인데 ㅡ 내 닭 백 마릴 고아 먹고 일어나고야 말겠다는 ㅡ 별반 도움은 모르겠고 입에 닭내만 맴돌고 자판 앞에서 몸만 배배 틀고 있어서, 이건 뭐, 닭에게도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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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몸에 열이 오르면 쉬이 가라앉지 않아 내심 '때이르게 찾아온 갱년기 아닐까'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언니도 같은 증상에 같은 의심을 품고 같은 진단을 내리고 있었는데, 잠시 대화를 나누고 둘은 "그냥 날씨가 많이 더운거"로 결론을 보았다. 건강염려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난히 몇몇 증상에는 새가슴이다. 손에 가시가 박히면 파상풍의 최악의 케이스까지를 떠올려 일가친척친구들이 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까지를 밀어붙이고 끝난다. 이런 나약한 닌간에겐 냉수마찰과 토끼뜀 수백 회 처벌을 내려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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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약한 닌간.







2010년 8월 2일 월요일

정신승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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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이 될까. 숱한, 넓은 의미의 거절 모두를 포함해서.

하루 3시간을 단어암기에 쏟아도 영어가 자기를 밀어내는 기분과, 남들 다 좋다는 책 읽어봤는데 나는 아무 감흥도 심지어 내용이 뭔지도 남지 않을 때의 기분과, 이력서 구골개를 웹에 뿌렸더니 이안류를 타고 자기 서버로 돌아와 용량을 꽉 채우는 기분과, 내 글이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기껏해야 분쇄기에 달달 갈려버릴 때의 기분과.

여기서 영어가, 책이, 온갖 회사가, 편집자가, "모두모두 작당해서 날 밀어낸다!"는 생각으로 번질 수는 있겠으나 그 다음이 문제렷다.
그래서 영어도 책도 회사도 모두모두 애초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로 가면,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주어야 한다.

떠나는 이여 잘가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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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대상부정 단계가 그래서 무섭다. 아 안되네, 아 안됐네,의 약한 체념이면 좋으련만.
사랑 고백 후 거절당하자, 그 여자애가 사실 볼 게 뭐 있냐, 다시 보니까 너무 구려, 심지어 그 여자애가 누구냐,로 가는 일련의 과정이랄까.

신기루, 무의미로 보고 나면 나는 방구석의 정신승리자가 될 뿐.
정신으로라도 이겨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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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마음 먹은 대로 잘 안되는 경험을 나에 대한 '거절'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슨 딱한 버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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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이 일련의 과정이 지난주의 내 심경이다.

[주의] 위의 기분나열은 나의 경우가 아니니 오해마시라.
         내겐 하루 3시간씩 단어암기하는 성실함부터가 없으니까.

[다짐] 쉴드업 공업해서 중이병에서 벗어나자. 밥을 많이 먹어야겠다.